당신들의 천국_이청준

*스리랑카에 다녀왔다. 여행자의 신분이 아닌 '직원'의 신분으로 떠난 첫 '출장'이었다. (실제로는 외유였지만 ㅎㅎ) 여행자로서 난 한국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물화되지 않은 삶을 보고 싶어 했다. '때묻지 않고 순수한 현지인'을 만나는 것은 개도국을 여행하는 자들의 로망일테니.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야만 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순수한' 어떤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장차 Aid worker로 일하게 될 사람의 마음자세로는 부적절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개발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됐고, 꽤 오래 전에 읽은 책,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읽고 싶어 졌다. 이전 홈페이지에 있던 글을 옮겨둔다.




이청준씨의 타계 소식을 들은 것은 몽골 울란바투르에서였다. 그의 작품 중 <당신들의 天國>은 꼭 읽고 싶었던 소설 중 하나였는데 만일 이 작품을 읽었다면 그의 타계 뉴스를 좀 더 무게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 더늦기 전에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여 4일만에 읽기를 마쳤다. 읽기 어렵지 않은 책이었지만, 여러 분야를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룬 책인지라 언젠가 다시 한번 읽겠다는 다짐을 남긴 책이다.

소설의 배경은 나병 환자촌인 소록도. 나병 환자로서 신체의 일부가 삭혀 문드러져가는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건강인’에게 전염되기 쉽다는 그릇된 사회적 인식 때문에 문둥이라는 낙인이 찍힌 자들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곳이다. 이 곳에 신임 원장 조백현이 부임해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집요하고도 치열한 투지”를 풍기는 그는 곧 환자들의 “바다 밑처럼 무겁고 커다란 침묵의 덩어리”와 대면하게 된다. 처음으로 원생들을 대면한 자리에서 그는“불신감과 배신감의 슬픈 노예”가 된 원생들의 자신감 없음을 비판하며 그들의 “인간개조”를 돕겠다고, 아니 강제로라도 하겠다고 선언한다. 조원장의 극단적 계몽주의가 여실히 드러나는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치며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피비린내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단순한 구도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사건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오히려 진정한 봉사는 무엇인지, 핍박과 차별 속에서 고립 당하여 사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유토피아(천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 섬사람들의 행복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지,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그리고 변질되어 배반으로 이어지는지, 참다운 자유와 사랑, 그리고 믿음은 어떻게 결합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인물들의 깊은 사색을 담아내고 있다.

극단적 계몽주의는 남을 돕기로 결심한 자가 지양해야 할 가장 큰 자세라고 여겨진다. 도움을 주는 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시혜적인 성격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을 돕는다는 순수한 행위는 권력 게임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록도를 나병 환자들의 천국으로 탈바꿈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천국을 만들고 말았던 주정수 전 원장이나, 문둥이들이 직접 땅을 간척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오마도라는 낙토를 만들게 했던 조백헌 원장. 두 인물 모두 극단적 계몽주의에 사로잡혀 소록도를 바꾸려고 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조원장 옆에는 이러한 그의 열정이 파국으로 치닫아 결국 자신의 동상을 완성하고자 마는 것을 염려하는 이상욱이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이지적이어서 오히려 소설의 리얼리티를 조금 떨어뜨린 이 인물은 하지만 조원장이 독선적으로 자신의 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인물이자, 결국 조원장의 변화와 성찰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원장의 과감하고 설득적인 선동에 쉽게 현혹되지 않고, 원생들의 ‘천국’에 대해 이성적으로 깊게 고민한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천국 건설에 있어서 구성원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상욱의 이러한 신념은 민주주의의 이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지배자가 천국을 제시하고 피지배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때, 즉 자유의지가 아닌 속박으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강제 받을 때 남는 것은 구성원 스스로의 배반 뿐이라는 사실 또한 담고 있다. 정치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대목이다.

 소설은 80년대에 쓰여 졌고 따라서 오늘 날 현대 문학의 일반적 특성인 쿨함, 가벼움 혹은 불명확함 등의 성격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매우 어려운 주제를 철학적으로 깊이 다룬다. 조백헌 원장과 이상욱 그리고 황희백 노인이 소록도 섬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를 놓고 하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이는 비단 소록도 이야기뿐만 아니라 더 넓은 사회 전반을 놓고 보아도 의미 있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가장 깊이 있고 명쾌하기도 했던 이상욱이 조원장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도대체 그 원장님의 천국이란 누구를 위해 꾸며지는 누구의 천국입니까? (…) 우리는 누구나 오늘의 자기 현실을 최종적이고 불가변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은 내일 다시 선택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서 그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다시 내일의 선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 입니다. (…)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땐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 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상욱은 문둥이들이 오마도 건설을 명 받고 그것을 피 땀 흘려 이루어 냈다고 가정해도, 그 천국은 ‘건강인’을 바라보고 지은 천국이기에, 그리고 섬 구성원들의 민주적 절차보다는 유능하고 추진력 있는 국외자 격의 '건강인 지배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에, 소록도를 더욱 넓힌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는 변모할 수 있는 열린 천국을 주장하지만, 조원장의 비판적 보조자로밖에 남을 수 없는 상욱의 지위로 볼 때 이를 위한 뚜렷한 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 

 소설의 제 3부에서 조원장은 떠났던 소록도에 원장 신분이 아닌 개인의 신분으로 돌아온다. 그의 떠남에 한 몫을 한 것처럼 그의 귀환에도 상욱의 역할은 크다.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 그리고 그 같은 운명을 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없는 사랑이나 봉사는 한낱 오만한 시혜자로서의 자기 도취적인 동정으로밖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조백현은 ‘원장’이란 권력자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섬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소록도에서 섬 사람들과 소통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생활인으로 남는다. 그가 원했던 천국, 유토피아는 더 이상 진전이 되지 못한 채 실패한 디스토피아로 귀결되었지만 소설은 개인이 사회를 이끌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는 허무주의로 끝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소록도 내 미간수들의 결혼 축사에서 “흙과 돌멩이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라는 대목에서 조원장의 긍정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지배/피지배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담아낸 소설은 다양하게 읽힐 여지를 남긴다. 처음 이 책을 접한 이번에는 작가의 정치학에 인상을 받으며 읽었던 것 같다. 좋은 소설인 만큼 한번에 그 깊이를 헤아리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느낀다. ‘당신들의 天國’을 다시 열게 될 때 보다 더 많은 사항을 넓은 범위로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김현은 책의 해설에서 소설의 가장 중심적인 두 문제를 이렇게 뽑아낸다.
1) 어떻게 하면 인간 사회는 천국이 될 수 있는가?
2) 권력의 행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한 그가 읽어낸 저자의 생각은 이렇다.
1)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해야 한다
2)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되어서는 안된다.

by iNno | 2010/08/08 01:34 | 책갈피의 그림자 | 트랙백 | 덧글(1)

Withdraw from Uppsala..


Withdraw from Uppsala..


웁살라를 떠나며 굳이 '철수' 혹은 '철군'이라는 어색한 영어 단어를 쓰게 된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게된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 행위 자체에 진한 아쉬움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한 학기를 무사히 끝내고 파도처럼 나를 휩쓴 공허감은 결국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웁살라를 떠남'보다는 '서울로의 돌아감'에 방점을 찍은 결정이었다. 최대한 합리적으로 한 학기의 삶을 예측해 보았을 때 웁살라에서의 한 학기는 저 어딘가에 무엇이 있겠지라고 믿으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라면, 서울에서의 한 학기는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지점을 확실히 정한 상태에서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미션들을 세워놓고 그것을 치밀하게 준비해가는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 붓을 수 있게 하는 전제조건인 평정심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무엇을 차곡 차곡 쌓아간다는 기분보다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느낌이 나를 종종 괴롭혔다. 여행자로서의 새로운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생활인으로서의 치열함, 두 극단을 동시에 추구해가고 싶었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무모한 도전 혹은 과한 욕심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결국은 무리하여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결심하였고, 수많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웁살라를 떠나 서울로 향하고 있다.


Withdraw 혹은 철군이라는 표현은 이 상황을 설명하는데 적절하겠지만, 그렇다고 '실패'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좋은 경험과 기억이 참 많았던 지난 시간이다. 내가 꿈꾸던 '이상적' 사회에 살면서 이 사회가 걸어온 궤적과 현 주소,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쟁점들과 앞으로 향하게 될 방향에 대한 담론 등을 접할 수 있었다. 부족함이 많았지만, 평소에 공부하고 싶었던 개발학을 공부하면서 이 학문의 주요한 흐름 정도는 대략 맛을 본 것 같다. 내 대학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사귄 사람들도 너무 그리울 거다. 여행하다 만나 스친 인연들과는 다르게 함께 생활하고 밥먹으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다져낸 정을 천천히 쌓아간 친구들은 그래서 너무 특별하다.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각자만의 그 독특한 개성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면서도 불연듯 떠오를 것이다.


긴 꿈을 꾼 것 같다. 웁살라를 꿈으로, 서울을 현실로 극단화하여 표현하는 것에는 웁살라에서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지만, 이제는 기억의 저편에 웁살라에서의 시간을 묻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정말 꿈만 같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확연하게 변할지라도, 흘러간 웁살라에서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음을 믿으련다. "기억의 토양에 생각의 나무를 심는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쉽게 정리되지 않는 시간들을 되돌려보며
스톡홀롬에서 떠나 모스크바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by iNno | 2010/01/29 23:56 | 길 위에서 주은 돌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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